국방일보 - [한국의 서원] 자연과 절묘한 조화 이룬 건축물 선비의 절제된 마음 담아내다

관리자 2022.08.10 17:57 조회 259
안동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로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과 그의 제자이며 셋째 아들 수암공 류진(1582~1635)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곳은 서애 선생께서 31세 때인 1572년 풍산 상리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만대루에 걸려 있는 북은 서원에서 원생들에게 공지사항을 알릴 때 사용됐다.
만대루에 걸려 있는 북은 서원에서 원생들에게 공지사항을 알릴 때 사용됐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있는 광영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의 원리를 나타냈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있는 광영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의 원리를 나타냈다.

한국 최고의 고건축물

1607년 선생이 돌아가신 후 지역 유림이 ‘풍악서당’ 안에 그를 추모하는 사당인 ‘존덕사’를 짓고 선생의 위판을 모셨으며, 매년 봄과 가을 향사를 받들면서 서원으로 승격됐다. 1614년 서원 앞 낙동강 건너 병풍 모양으로 둘러서 있는 병산의 이름을 따서 ‘병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후 철종 14년(1863) 병산서원으로 사액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다. 사적 제260호로 지정돼 있으며,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병산서원은 낙동강의 은빛 백사장과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병풍을 둘러친 듯한 ‘병산’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할 만큼 빼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누각 건물인 만대루에서는 병산의 자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유생들이 교육받던 강당인 입교당은 자연과 건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친화적인 장소의 본보기로, 우리 민족의 절제된 마음과 자연을 지켜 가고자 하는 민족성을 잘 보여 준다. 선비의 절제된 마음을 담아낸 인공적인 건축물과 하나 돼 펼쳐지는 장엄함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한옥의 완숙미를 보여 주며, 주사 앞에 달팽이 모양을 한 하늘 열린 통시(화장실)는 또 다른 볼거리로 재미를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병산서원은 한국 서원의 기능이 ‘교육’에서 ‘공론의 장’으로 확대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나라 최초로 수천 명이 뜻을 모아 상소를 올린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지역 현안에 적극적으로 뜻을 모으고 조정했다. 이는 병산서원에 간직된 갖가지 고문서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병산서원 관계자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위판을 가리고 있는 나무상자를 들어 위판을 보여 주고 있다.
병산서원 관계자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위판을 가리고 있는 나무상자를 들어 위판을 보여 주고 있다.

누각 건물인 만대루에 오르면 앞에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의 자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학문을 수양했다.
누각 건물인 만대루에 오르면 앞에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의 자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학문을 수양했다.

서원 둘러보기

약간 비탈진 곳에 전학후묘의 배치로 세워진 병산서원은 뒤에는 화산이 있고, 앞에는 낙동강 상류의 물이 굽이치고 있다. 강 건너는 병산이 병풍처럼 자리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서원이 보인다. 붉게 타는 배롱나무꽃 그늘을 지나 ‘복례문’에 들어서면 병산서원의 랜드마크인 ‘만대루’를 만난다.

복례문은 서원의 정문으로 삼문이다. 솟을삼문의 가운데 문은 판문이고 좌우 문은 담장과 구분되는 벽체를 1칸씩 두고 있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한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의 한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왔다.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해 질 녘에 마주 대할 만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이 모여 늦도록 즐기기 좋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해 질 무렵 사방이 트인 만대루 누마루에 오르면 낙동강 넓은 모래밭과 그 건너 병산을 7폭 병풍에 이어 담고 있는 것 같다.

문루인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을 겸할 수 있는 장소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2층 팔작기와집에 처마는 홑처마로 돼 있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광영지’란 이름의 연못이 있다.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의 원리를 나타냈다. 현재에도 광영지는 천원지방의 원리를 나타낸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서원 앞마당에는 ‘가르침으로 바로 세운다’는 뜻의 ‘입교당’이 있다. 강당인 입교당은 중앙의 3칸 대청마루와 양쪽 협실로 구성돼 있다.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됐다. 입교당의 원래 명칭은 숭교당이었고, 명륜당으로도 불렀다.

기숙사인 동재 동직재와 서재 정허재는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 마당 양쪽에 마주하고 있다. 각각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민도리집으로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돼 있다. 서재 정허재의 강당 쪽 작은방은 서책과 자료를 보관하는 도서실로, 장서실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2칸 규모의 큰방은 유생들의 방으로 동재에는 상급생이, 서재에는 하급생이 기거했다.

입교당 뒤편 왼쪽에 있는 장판각은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는 곳으로 서원의 출판소 기능을 하고 있다. 병산서원의 장판각은 바닥 밑을 띄우고 앞면에 판벽을 구성해 목판이 습기로부터 훼손되지 않도록 배려했다. 또한 화재를 막기 위해 다른 건물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교건축물

서애 류성룡 선생·수암공 류진 배향

낙동강 건너 둘러선 병산의 이름 따

사적 제260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천 명이 상소 올린 최초의 서원

교육 넘어 공론의 장으로 서원 기능 확대


입교당 뒤에는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존덕사가 있다. 이 존덕사로 들어가는 문을 신문이라고 하는데, 신문은 서원의 내삼문에 해당하며 향사 때 제관과 제물이 출입하는 문이다. 부정한 것을 막기 위해 붉은색을 칠했다. 4개의 초석에 서애 선생의 일생을 주역으로 표현한 팔괘가 2개씩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신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서애 선생과 수암공의 위판을 모신 사당인 존덕사가 나온다.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풍판이 설치돼 있다. 좌우에는 계단이 있고, 기단 앞 양측에는 8각 석주 위에 반원구의 돌을 얹어 놓은 정료대가 있다. 존덕사 오른편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이다. 대개는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데, 병산서원은 전사청과 사당이 담으로 분리돼 있다. 아래쪽은 주사로, 서원의 관리인들이 사는 곳이다. 사당을 관리하는 묘지기와 유사를 보좌하는 장무, 학생들의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이 있다. 병산서원의 주사는 안동지방 특유의 뜰집이다. 즉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의 살림집을 구성했다.

달팽이 뒷간이라고 부르는 화장실도 병산서원이 사적으로 지정될 때 포함됐다. 서원 밖 주사 앞에 있으며, 진흙 돌담을 시작 부분이 끝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다. 옛날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 한다.

이렇듯 병산서원의 ‘선현의 학덕을 추모하는 제향공간’ ‘세상 이치를 탐구하며 책을 읽고 토론하는 강학공간’ ‘자연의 변화 속에서 그 이치를 깨닫는 유식공간’ 등은 모두 성리학의 ‘바르고 선한’ 전인교육으로 채워진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글=박영민/사진=백승윤 기자(항공촬영=주상현 기자)